1월 24 2005
까치밥
일요일 한가한 오후…
빈이엄마랑 이모랑 할머니는 저녁거리, 빈이분유를 핑계삼아 오늘도 대형마트를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오전부터 바쁘다. 점심때거리 챙겨놓고 갈려고… 난 빈이엄마랑 작은 이모랑 쇼핑가면 이모한테 다짐을 받는다. 몇시까지 안들어오면 알아서 하라고 한다. 오늘도 아니나 다를까 데드라인 10분전에 문열고 들어온다. 마음이 급해서 쇼핑을 제대로 못한다나? 3시간반이 모자르면 나보고 어쩌라고…
빈이이모부랑 어제는 김치찌게를 놓고 한잔, 오늘도 이모,엄마가 준비해준 닭도리탕을 놓고 술잔을 마주놓고 앉았다. 잔이 몇순배 돌아가고 우리빈이도 엄마가 사온 설치레를 입고 좋아 이모가 틀어놓은 트로트메들리에 춤한판으로 흥겹다. 등뒤로 계속해서 들려오는 고향찾기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저멀리 앙상한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난 고향을 떠올리면 항상 우리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감나무와 어린시절 누가 목을 매었다니하는 무시무시한 얘기의 옆집의 백년도 넘은 감나무가 떠오른다. 우리집 담장 주위에는 수령이 50년이 넘은 감나무가 6그루가 집을 둘러싸고 해마다 초여름 마당에 떨어진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고 그 감꽃을 주워먹으며 여름의 시원한 그늘과 가을의 풍성함을 안겨주었고 겨울 찬바람의 따뜻한 아랫목에서 시사(묘사)후 나눠먹던 잘 마른 시루떡에 찍어먹던 잘익은 홍시와 어린시절 감나무를 타며 감을 따고 떨어지며 하는 그 기억들이다.
우리집은 길가집이라 지금은 도로공사한다고 담장의 감나무는 모조리 다 잘려버렸지만 옆집의 백년넘은 감나무는 누구도 자르기를 두려워하여 아직도 어른 두사람이 손을 맞잡아야하는 밑둥치와 봄이면 싹을 틔우고 가을이면 홍시를 주렁주렁 매달고 겨울이면 휘영청 밝은 달빛에 커다랗고 애처롭게 걸려있는 까치집 하나와 그 옆에 매달린 조그만 그림자들 ‘까치밥’을 매달고 처연히 서 있다.
매년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우리 삼형제는 아버지랑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딴다. 감나무는 가지가 너무 강건해서 잘 찢어진다. 큰가지 작은가지 할 것없이 결방향으로 너무 잘 찢어지기 때문에 몸을 지탱해주는 커다란 나무가지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대나무로 만든 길다란 장대의 끝을 반으로 쪼개 감이 달린 끝가지 부분을 꺽어서 감을 딴다. 물론 홍시는 다 떨어진 양말을 동그란 고리에 매달아 그 속에 감을 넣고 살며시 꼭지를 흔들어 딴다.
감을 따다보면 감따기가 갑자기 재밌어진다. 감나무가지를 꺽을 때 힘조절을 잘해야 감이 가지에서 떨어지지않고 잘 따지지만 조금만 힘을 과하게 쓰면 감이 가지에서 떨어져 버린다. 그 느낌을 가질 때쯤이면 벌써 한나무의 감이 거의 떨어질 즈음이다. 마저 남은 것을 딸라치면 밑에선 아버지가 이제 그만따라고 하신다. ‘까치밥’이란다.
우리네 조상들은 없이 살아도 그래도 한겨울 먹을 것도 없이 지내는 새들을 배려하여 까치밥이라는 이름으로 감나무 가지마다 몇 개의 빨간 까치밥을 매달아 놓고 겨울을 지냈다. 왜 까치밥이었을까?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나 소식이 온다고 믿었던 우리네가 그 새들을 위한 선물에다 사람들의 기원을 까치밥이란 이름으로 매달아 놓았던 건 아닐까?
감나무는 참 버릴 것이 없는 나무다. 봄이 되면 잎을 따 감잎차를 만들고 그런 후 감꽃이 피면 그것으로 술을 만들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가을이면 열매를 겨울이면 낙엽과 지나는 바람에 다쳐 떨어진 잔가지로 불쏘시게를 만들고 수명이 다하면 그 강건한 성질과 나이테의 좌우균형이 좋아서 자개장으로 만들고 나머지 잔가지로는 빨래방망이를 만들어 썼다. 감나무에는 벌레가 자라지 못한다. 타닌성분이 살충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벌레가 없어 오랜기간 사용하여도 나무가 썩거나 비틀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옷감을 잘 보존할 수 있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하여 그 감으로 꽂감을 만들고 그 껍질을 잘 말려 겨울 어린아이들의 간식거리로 먹었다. 처마끝에 매달린 곶감을 몰래 빼어 먹던 일과 이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부모님은 산감을 따서 곶감을 깍아 어린아이들이 일부러 빼먹게 두고 좋은 감을 일부러 골라 손이 닿지 않는 선반에 올려놓고 말렸다. 어린 시절 뒤산 호랑이보다 더, 일본순사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곶감이었다. 어린아이가 보채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순사가 잡아간다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울던 아이도 ‘곶감주까’ 한마디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그 오래된 고목의 까치밥도 이젠 더이상 까치밥이 아니다. 농촌의 젊은 일손들은 벌써 도시로 떠나버리고 더 이상 겨울 간식거리로 감도 필요치않고 또 그걸 딸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겨울서리에 흐물흐물해진 서러운 감은 더 이상 까치밥도 아닌 마당을 더럽히는 귀찮은 존재밖에 되질 못한다. 그래도 아직도 내게는 겨울철 서러운 달빛아래 늙은 감나무에 걸린 까치집과 까치밥이 내게는 고향하면 떠오르는 아련한 잔상이다.
1월 24 2005
연필을 깍으면서
난 아직도 사무실에서 왠만한 공문서는 컴퓨터로 작업하고 그 나머지 문서로 남길 것이외에는 전부 연필을 사용하여 기록한다. 왜 다른 사람들이 연필로 쓰느냐고 물으면 웃으면서 간단하게 말한다. ‘편하니까’ 그 다음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온다.’샤프로 쓰면 편하잖아요’ 물론 샤프로 쓰면 연필깍는 수고도 들 수 있고 글을 쓰다 심이 부러지면 샤프 ‘머리’를 콕콕 누르면서 생각의 흐름을 끊지않고 글쓰는 일을 편하게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심이 부러질 때나 심이 굵어져 글쓰기가 힘들어지면 책상서랍에서 문구용 칼을 꺼내 휴지통을 책상 아래 바쳐놓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연필을 깍는다. 글이란게 물 흐르듯이 잘 써지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자 한자가, 한문장을 만든다는게 힘이 든다. 글쓰기가 힘들어지면 책상 아래에 또 휴지통을 바쳐놓고 일부러 새 연필을 꺼내들고 예쁘게 연필심을 깍는다.
연필을 깍으면서 떨어지는 처음의 커다란 덩어리는 바로 휴지통 속으로 차곡차곡 들어가지만 심의 모양을 잡을 때는 떨어지는 아주 얇은 나무조각이 말리면서 휴지통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날리면서 바닥을 어지럽힌다. 연필을 다 깍고 나면 이 어지럽혀진 나무부스러기들을 정리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꼭 연필심이 부러져서, 닳아서라기보다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일부러 연필 탓을 하면서 새로 연필을 깍는 것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연필이 귀했다. 그때는 흑연이 귀한 시절이라 연필심은 아주 단단하게 만들어 조금씩 닳게 만들었다. 연필이 짧아지면 볼펜자루에 끼워 지금은 볼 수도 없는 몽땅연필을 만들어 사용했다. 글이나 선이 연하게 나오면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면서 쓰던 기억이 새롭다.
학용품도 흔한 시절이 아니어서 책가방은 보따리를 둘둘 말아서 사용하고 필통은 보통 양철로 만들어 이것에 연필을 넣어 하교길에 좋다고 뛰어가는 사내아이들의 등짝에서 다 까먹은 도시락통 속의 수저랑 젓가락과 필통속의 연필들이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부러지는 연필들은 또 볼펜을 등에 메고 몽땅연필이 되었다.
내 아버지는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였다. 산골촌에서 그래도 제법 밥먹고 산다는집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큰아버지 중학교 공부때문에 국민학교도 다니다 마치지도 못하고 중퇴를 하였다. 큰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은 그래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희생으로 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도회지로 나와 살림을 꾸렸다.
그런 아버지는 항상 공부에 대한 욕심과 한이 있어 나는 꼭 좋은, 많은 공부를 해야한다고 어린 장남의 연필은 꼭 당신이 정성을 다해 깍아주곤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어린 삼형제의 연필을 정성으로 깍아주고 아이들은 그 옆에 아래목에 배를 깔고 누워 공부를 하곤 했다.
지금도 연필을 깍으면서 내 아버지가 내개 연필 깍아주던 마음을 보려고 한다. 지금 우리 빈이가 자라 또 연필을 쓸 나이가 되면 나는 그 아버지의 마음으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연필을 깍아줄 것이다. 물론 빈이는 벌써 연필보다는 컴퓨터자판으로 글을 먼저 쓸 것이고 샤프로 글을 쓸 것이고 또 좋은 볼펜으로 글을 쓸 것이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 빈이의 연필을 깍아주려 한다.
By vinipapa • 엄마아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