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 2005
오래전 일기를 꺼내어보고…
오늘 책장에서 오래전 일기장을 꺼내 보았다. 옛날 동아리시절의 날적이들을 모아 내가 간직하고 있는데 벌써 십년도 훌쩍 지나버린 내삶을 조그만 기록들이다.
이른 새벽부터 내린 비가 아직까지 내린다. 창문 틈새로 배어드는 습기로 온몸이 나른하다. 날씨탓인지 분위기탓인지 커피자판기 앞은 사람들로 붐비고 책상 옆자리에는 피곤한지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데 신문하나 귀퉁이의 야한 사진하나가 다리만 남겨놓고 잘려 나갔다.
지금 고향에는 적절한 봄비에 못자리 준비를 할 것이다. 엄마 생일이 다음주인데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비가 오면 무슨 까닭인지 집생각이 난다. 벌써 한달이 넘게 지났지만 잠깐 다녀온 일외에 가족과 함께 하루를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얼마전에 낳은 송아지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짬을 내서 내려갔다와야겠는데 내려갈 때의 부푼 마음보다 떠나올 때의 서운함이 커서인지 잘 내려가지를 못한다.
봄맞이 대청소를 하려는가? 자취집 거실에는 먼지앉은 물건들이 가득히 자리를 차지하고 쓰레기통은 잡동사니로 풍성하다. 멀리 인덕관 앞의 가로등은 대낮을 훤히 밝히고 미라보다리에는 우산 쓴 연인들, 멀리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패의 연습하는 북소리는 한가한 일요일 오후의 또 다른 풍경이다. 소슬바람이 불어 부딪힌 나무들이 삐걱삐걱 거친 소리를 내고 세딸아이의 아버지는 또 어디를 가려고 나서는지…
또 빗방울이 떨어지려한다. 그러나 비온뒤 굳은 땅에 고인물에 맑고 푸른 하늘과 눈이 시려울 해가 비추일 것이다. 지금 산에는 온통 싱그른 푸르름인데 뿌리는 빗살에 하얀 안개가 끼어 자욱하게만 보인다. 하늘다리를 보려면 우리는 소나기를 맞아야 한다. 사람들이 이 봄날의 한순간을 잡으려 한다. 오늘은 아마도 흑백사진이 좋으리다. 식어버린 커피잔을 붙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에 지친다.
청소년축구 한일전을 보려고 시간을 때우려 옛날 일기를 꺼내보았는데 정말로 옛날의 기억들은 언제나 입가에 웃음을 지우는 일들이 그때는 왜 그랬을까하는 마음이… 이제 축구보러 가야지!
1월 27 2005
설날은 E-mail로부터 먼저 온다
요즘 아침 E-mail Notifier로 부터 리스팅되는 스팸성(내가 정보를 요청했으므로 스팸은 아닌데) 메일의 대부분은 설날 선물용품에 대한 정보성 광고 메일이다. 우리네들을 바쁘다는 핑계로 어지러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요즘같은 불경기에 설날은 까마득하고 단지 며칠동안 쉴 수 있다는 아니 회사를 안간다는 의미밖에 없는데 대형업체들은 설날은 여전히 물건을 많이 팔 수 있는 좋은 기회인가보다.
시골에선 설날이 되면 엄마가 제일 먼저 바빠진다. 우선 튀밥, 강정, 가래떡, 송편 등 온갖 설날 손님맞이용 음식을 만들고 손수 밤을 새워 짠 왕골 돗자리를 시장에 들고 나가셨다. 이걸 좋은 값에 팔아야 설날에 쓰일 제수를 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삼형제 ‘설치리’를 사고 조카들과 친척 아이들의 세배돈을 준비할 수 있었다.
예전엔 설날이 오는 것을 제일 먼저 알리는 것은 동네마다 찾아다니는 박상(튀밥)장수의 펑하고 터지는 튀밥 튀기는 소리일 것이다. 펑펑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새하얗게 피는 김속을 뛰어다니며 그것을 조금 얻어 먹으려는 아이들과 깡밥(강정)을 만들려고 내어 놓은 쌀, 보리, 콩, 강냉이와 작년에 말려 놓은 가래떡 썰어 놓은 것 등 곡물로 튀겨 부풀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울긋불긋한 보자기 덮힌 바구니에 담겨 줄을 서 있고 거기에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만이 신이 났다.
우리집은 겨울 농한기가 되면 왕골 돗자리를 밤을 새워 짜서 5일장에 내다 팔았다. 이놈의 왕골은 머리위와 줄기, 잎이 톱니모양으로 날카로와 보드라운 살결이 스쳐만가도 베어 피를 보기 일수였다. 그래서 시원할 때 긴팔 옷을 입고 이슬이 걷히기 전에 얼른 빼어 왕골머리를 잘라 한단 한단 묶어 개울가에 씻어 말려놓고 새벽에 풀먹이러 보내 놓은 소를 찾으러 산으로 갔다.
씻어 말린 왕골은 좋은 놈은 어른 키보다 훨씬 커서 어른들은 한명이 왕골 껍질을 6면 정도로 벗겨내고 아이들은 팔이 짧아 두명이서 조를 짜서 서툰 솜씨로 만들었지만 손이 모자라 이것도 도움이 되었다. 서둘러 먹은 아침에 한참을 지났어도 아직 해는 아직도 중천인데 저쪽 서쪽 하늘에 소나기 먹구름이라도 끼일라치면 얼른 해뜰 때 잔디 위에 널어 놓은 왕골 껍질을 걷어러 서둘러 서둘러 뒷동산에 숨이 차게 뛰어 올라갔다. 이놈이 비를 맞으면 표면에 울긋불긋 얼룩반점이 생겨 똑같은 노력에도 반값도 못받았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물들 때쯤 한아이는 또 점심에 풀어 소를 찾아 뉘엿 뉘엿 지는 해를 보며 내려오고 한아이는 여름 좋은 볕에 말린 왕골을 걷어 내어 수줍은 처녀의 긴머리 빗듯이 가지런히 참빗으로 빗어 거풀을 벗겨내고 모아서 한단 한단을 곧추 세워 놓고 이놈을 여럿이 묶어서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 상투 뽑듯이 키 큰순으로 위에서 뽑아 올려 등급을 분류해서 서늘한 곳에 잘 말려 보관해 놓았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되면 소죽을 끓이려고 사랑방에 군불을 넣어 놓고 그 속에다 고구마나 밤을 넣어 밤이 탁탁하고 터지는 소리에 잘 익혀 구워내어 한겨울 저녁 간식거리를 만들어 놓고 뜨뜻한 아랫목에 부모님은 부러지지 않게 찬물에 불려 놓은 왕골을 장단에 맞춰 아버지는 한개 한개 돗자리틀에 메어 놓은 씨줄날줄 사이에 찔러 넣고 엄마는 쿵덕쿵덕 이쪽 저쪽으로 틀을 뒤집어 찍으며 그 겨울 밤을 지샜다.
몇 천개를 찔러 넣어 한장를 만드는데 열대여섯 시간을 찍어야 겨우 세장. 이것을 모아서 5일장에 내다 팔면 그래도 새파란 만원짜리 몇 장을 움켜쥐고 요놈은 제사상, 요놈은 설치리, 요놈은 세배돈으로 쪼개어서 며칠 만에 따라온 아들을 이끌어 시장옆 온통 붉은 색의 소방서 앞에 있는 조그만 중국집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도 한그릇을 사주셨다.
이제 중국산 돗자리가 들어온지도 십여년도 훌쩍 넘었고 그 노동의 댓가로 부모님의 팔과 오래도록 앉아 있어 생긴 관절염 뿐이지만 그래도 아직도 사랑방 백열등 아래서 돗자리 짜는 그 겨울의 소리와 설을 맞이하기 위한 며칠 동안의 그 아련한 풍경들이 그리워진다.
By vinipapa • 엄마아빠 • 0